엄마가 덤덤한 카카오톡 메신저로 온 가족에게 아빠의 전립선암 2기 진단 소식을 알렸다. 메시지는 덤덤했지만 엄마는 많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메시지를 한 자 한 자 눌러썼을 거다.
33분 동안 달리기를 한 직후, 기분 좋게 시장에 들러 그간 눈독 들여놓았던 털복숭아 3개를 사들고 집에 걸어가는 길에 엄마의 메시지를 봤다. 뭐라고 해야 할지 잠시 멍해졌다. 당장 내가 아빠와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아직 아빠랑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우리 아빠가 너무 좋다. 생각했다.
그리고 검색창에 '전립선암 2기'를 검색해 보았다. 다행히 전립선암 1기와 2기는 생존율이 100% 가까이 된다는 포스팅이 많았다.
다시 가족 채팅방으로 돌아가 '전립선암 2기는 생존율이 높다더라'는 메시지를 썼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개인 카톡을 보냈다. 남편은 한국어가 난무한 우리 한국 가족 카톡방을 안 읽고 넘어갈 때가 많으니까.
"My dad has a prostate cancer phase 2". 남편의 답장, "I saw it. F*ck"
집에 도착해 바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는 엄마를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엄마는 아빠랑 이야기하라며 울먹이며 아빠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한창 TV를 보던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아빠는 괜찮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평소의 아빠와 같았다. 엄마를 따라 울먹이는 나를 보며 아빠는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다. 어떻게 암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아빠랑 대화를 하는 동안 산책을 다녀온 남편이 걱정스런 얼굴로 방으로 들어왔다.
무료로 5개 암 지표 검사를 할 기회가 있어서 엄마와 함께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검사 결과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는데, 전립선암 수치가 정상 수치 바로 밑이었다. 처음에는 의사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지난 3년 간 아빠의 간수치가 계속해서 높아진 기록을 보고 조직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물론 지난 3년 간 아빠의 간수치는 정상 범주이긴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입원해서 조직검사를 한 직후, 아빠와 엄마는 잠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결연 후원하고 있는 해외 아동을 만나고 오는 여행이었다. 예쁜 아이들을 만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조직검사 결과 전립선암 2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빠와 대화를 마친 후 엄마에게 다시 핸드폰이 넘어갔다. 울음을 잠시 그쳤던 엄마는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생활습관이 건강했던 아빠가 암이라니, 정말이지 암이라는 놈은 랜덤으로 찾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가 암에 걸려 서럽다고 했다. 온 가족의 암보험을 더욱 단단히 들어야겠다는 선언도 하셨다.
나도 암이라는 놈이 정말 막연히 무서워서 겁이 나고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다.
다른 암이 아닌, 생존율이 높고 진행이 더딘 것으로 알려진 암이라서 감사하다.
암 3기나 4기에 발견한 것이 아닌 2기에 발견해서 감사하다.
아빠가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암 진단을 받지 않고, 다녀와서 진단받아 감사하다. 미리 암진단을 받았다면 해외 여행 갈 기분도 안 났을 것 같다.
이미 유방암 0기를 이겨낸 경험이 있는 엄마가 아빠 옆에 있어서 감사하다. 물론 지금 당장 엄마는 당사자인 아빠보다 더 슬픔에 빠져있긴 하지만, 엄마는 매우 강한 사람이다. 아빠를 암으로 죽게 내버려 둘리 없다.
아빠를 힘들게 하거나 신체적으로 괴롭게 하는 증상이 없어서 감사하다. 아빠는 일상생활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어나가며 사명을 다해 일을 할 거다.
대한민국 국민건강보험이 있어 감사하다. 암환자라고 진료비 500원을 냈다고 한다. 다음 주에 있을 정밀 검사는 5만원이면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들어놓은 암 보험이 있어서 감사하다. 엄청난 금액은 아니지만, 암 치료 때문에 갑자기 일을 쉬게 되어도 당분간은 금전적인 걱정은 덜었으니.
다음주 월요일에 암이 림프절이나 뼈에 전이가 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정밀 MRI, CT 검사 등이 있다. 결과는 검사 후 이틀 뒤인 수요일에 나온다. 온 가족이 힘을 모아 아빠를 위해 기도한다.
슬픔보다는 감사할 것들을 찾아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자.
나는 아직 아빠랑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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